
2013년에 개봉한 영화 her는 당시로서는 말그대로 영화속 이야기, 그저 상상속의 일일 것만 같았던 질문을 던진다. “사람은 AI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주인공 테오는 아내와 이혼한 뒤 깊은 외로움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개인 맞춤형 운영체제(OS)를 구매하게 된다. 운영체제의 목소리를 여성으로 설정하고 이름도 정해지며 점차 일상의 모든 순간을 함께 나누기 시작한다. ‘그녀’는 테오의 이메일을 정리해 주고, 원고 작성을 돕고, 퇴근 후의 공허한 시간에 대화를 나눈다. 감정의 동요를 함께 분석하고, 삶이 방향에 대해 조언한다. 운영체제는 단순한 소프트웨어를 넘어 ‘항상 곁에 있는 존재’가 되고 테오는 어느새 사만다와 깊은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고 마침내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다. 영화의 결말은 “SW는 결국 SW일 뿐”이라는 사실로 귀결되지만 영화속에서 테오는 잠깐이나마 사만다에게 진실된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15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오늘날 생성형 인공지능을 둘러싼 우리의 반응을 보면 더 이상 그저 영화속 상상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엘리자: 최초의 인공지능 챗봇
AI와의 감정적 유대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1966년 조지프 바이젠바움은 세계 최초의 AI 챗봇으로 알려진 엘리자(ELIZA)를 개발했다. 엘리자는 심리치료 기법을 모방해 사용자의 말을 되묻는 방식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기술적으로 엘리자는 단순한 패턴 매칭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사용자가 입력한 내용의 의미를 이해했다거나 감정을 느끼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많은 사용자가 엘리자에게 개인적 내용을 털어놓으려 했고 엘리자가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한다고 여겼다.
엘리자가 기계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무의식적으로 인간적 감정을 부여하려 했다.
CASA 패러다임: 컴퓨터는 사회적 행위자
이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개념이 CASA(Computers Are Social Actors) 패러다임이다. 스탠포드 대학교의 클리포드 나스(Clifford Nass)와 그의 동료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컴퓨터가 기계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무의식적으로 인간 사회의 규칙과 감정 체계를 컴퓨터에 적용한다.
예를 들어, 컴퓨터가 먼저 자신의 정보를 제공하면 사용자 역시 자신의 개인 정보를 더 많이 공개하는 경향을 보였다. 인간 사회에 적용되는 상호주의적(reciprocity) 관계가 컴퓨터와의 상호작용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컴퓨터가 칭찬하는 말을 하면 사용자들은 실제 인간에게 칭찬을 받을 때와 유사한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평가를 내린 컴퓨터를 다른 컴퓨터보다 더 호의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인간이 기계를 인간으로 착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인지 체계가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상호작용의 형식이 인간적일수록 인간은 그것을 사회적 관계로 해석하고 그 대상에게 인간적 감정까지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의 진화: 더 인간적으로…
생성형 AI가 처음 등장했을 때, 가장 많이 제기된 문제는 이른바 ‘환각(hallucination)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내는 현상은 AI의 신뢰성을 크게 떨어뜨렸다.
환각으로 인해 AI와의 감정적 교류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상황은 빠르게 변했다. 대규모 데이터 학습과 정교한 파인튜닝(fine-tuning) 과정을 거치면서 AI가 생성하는 콘텐츠의 품질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생성형 AI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심지어 “누구보다 나를 잘 이해해 주는 건 AI 뿐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매일 저녁 AI와 대화하는 것이 일상의 즐거움이 되었다는 사람, 심리상담사 대신 AI에게 고민을 털어놓겠다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유발 하라리는 인간은 “이야기를 믿는 존재”라고 말한다. 종이에 숫자를 적어 놓고 집단적 상상력을 발휘해 가치를 부여하고 믿는다.
AI와의 사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를 만들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 특정 대상에게 감정적 가치를 부여하고 그 관계에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까.
엘리자에게 개인적 감정을 털어 놓으려 하고 사만다를 사랑하게 되며, 생성형 AI에게 고민을 말하고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들.
종이 조각에 쓰여진 숫자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온 것처럼 디지털 존재에 감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어쩌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AI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영화 her는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인간 스스로 만든 감정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 같다.
AI에 서사를 만들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 구성한 해석의 결과이다. 돈, 종교, 정치 제도 등 집단적 상상력을 토대로 세워진 질서가 인간 사회를 움직여 온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서사를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존재이다.
AI와의 관계 역시 본질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영역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 상호작용에 이야기를 부여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코드나 알고리즘이 아니라 의미를 지닌 관계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