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컴퓨터 개념을 최초로 제안한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
오늘날에는 그야말로 스마트폰 하나로 우리 일상의 거의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다.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고 독서를 하고 음악이나 영상을 감상하며, 필요한 물건을 찾아 결제해서 구입할 수 있다. 친구나 가족과 연락을 주고 받는 건 당연하고 화상회의를 통해 업무 미팅을 하거나 보고서를 작성할 수도 있다. 은행 업무는 물론이고 음식 주문, 길 찾기, 택시 호출, 병원 예약까지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못하는 일을 찾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소소한 일상은 물론 심지어 해외 여행을 떠날 때도 스마트폰 하나만 달랑 들고 가는 것이 가능해질 지경이다. 항공권, 숙소 예약증은 물론이고 도착해서도 지도앱을 보며 낯선 길을 찾아간다. 언어 문제도 걱정이 없다. 번역기를 돌릴 것도 없이 이제는 그저 말하면 바로 원하는 언어로 답을 받을 수 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모두 다른 기계나 도구가 필요했던 일들을 이제는 스마트폰에 앱을 깔고 앱을 실행시키기만 하면 해결할 수 있다.
이러한 범용 컴퓨터의 원리를 수학적으로 정립한 인물이 바로 영국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 1912-1954)이다.
앨런 튜링은 컴퓨터가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전인 1936년 하나의 기계로 서로 다른 계산을 할 수 있는 튜링 머신(Turing Machine)의 개념을 제안했다.

튜링 머신, 하나의 기계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장치
1936년 튜링은 ‘계산 가능한 수에 관하여(On Computable Numbers)’라는 논문에서 오늘날 ‘튜링 머신(Turing Machine)’으로 불리는 계산 장치를 제안했다.
1935년 캠브리지 대학교의 수학 교수인 맥스 뉴먼은 할베르트의 프로그램 가운데 수학이 불완전한 규칙에 의존한다는 점에 대해 강의하고 있었다. 그의 수업을 듣던 앨런 튜링은 1936년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 문제의 응용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썼다. 이 논문에서 튜링은 “계산 가능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와 계산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이후 그는 수학적 계산을 논리적인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계의 개념을 제안했는데 오늘날 컴퓨터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그는 이 기계를 ‘논리 계산 기계(Logical Computing Machine)’라고 이름 붙였다.
이 기계의 구조는 단순하다. 기호(symbol)를 기록하는 긴 테이프, 그 기호를 읽고 쓰는 장치, 그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규칙으로 이루어진다. 즉, 기계는 테이프에 적힌 기호를 읽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새로운 기호를 읽거나 읽기 장치를 이동시킨다. 미리 정해진 기호를 테이프에 써 넣기만 한다면 기계는 정해진 약속대로 작업을 처리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나의 테이프에 작성된 기호대로 작업을 수행하는 하나의 튜링 기계를 여러 개 모으면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범용의 기계(universal machine)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의 프로그램과 유사한 개념이다. 하나의 컴퓨터에 서로 다른 소프트웨어를 실행하면 문서 작성 프로그램이 되기도 하고 계산기나 게임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블레츨리 파크, 2차 대전 당시 영국의 비밀 암호 해독 작전
1939년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튜링은 영국의 비밀 암호 해독 기관인 블레츨리 파크(Bletchley Park)에 합류했다.
당시 독일군은 ‘에니그마(Enigma)’라는 암호 기계를 사용해 정보를 주고 받았는데 에니그마는 설정에 따라 암호가 계속 달라져 당시로서는 해독이 매우 어려웠다.
튜링은 블레츨리 파크에서 에니그마의 암호 해독을 위해 ‘봄브(Bombe)’를 개발했다. 암호 해독 정보는 독일 잠수함의 움직임을 파악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군사 기밀이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암호 해독 작전의 주요 내용이 공개되기 시작했고 튜링의 업적도 재평가 받는 계기가 되었다.
기계가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전쟁 이후 튜링의 관심은 인간의 지능으로 향했다. 만일 기계가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다면 컴퓨터와 대화하는 인간이 컴퓨터임을 알아챌 수 없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튜링 테스트(Turing Test)’이다.
만약 어떤 컴퓨터가 인간의 행동 양상을 똑같이 흉내낼 수 있어서 그 컴퓨터와 작업하는 사람이 컴퓨터와 작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그 컴퓨터는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는 이 내용을 1950년 발표한 논문 ‘계산 기계와 지능(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에서 처음 소개했다. “기계가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제안하고자 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튜링은 이 때 벌써 컴퓨터가 지능을 가질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튜링 테스트는 이미테이션 게임(imitation game)의 개념을 차용한 것이다. 이미테이션 게임이란 안을 볼 수 없는 두 개의 방에 있는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알아내는 게임이다. 남자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두 사람 중 누가 진짜 남자인지를 알아내는 게임이다.
튜링 테스트는 근본적으로 컴퓨터를 위한 질문만 해야 하므로 진정한 인공지능 여부를 테스트 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즉, “예/아니오”식의 질문이나 좁은 범위에 한정된 질문의 경우에만 테스트를 통과할 가능성이 높고 주관식이나 대화형 질문에는 대답을 잘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천재의 삶, 영원히 남은 유산
컴퓨터 과학과 인공지능 분야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이지만, 그의 생은 오히려 불행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동성애가 금기시 되던 시절이었고 그가 이루어낸 성과들 역시 전쟁 상황에서 국가 기밀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동성애 치료 과정에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큰 고통을 겪다가 41세에 사망했다. 자살로 결론이 나긴 했지만 사망 경위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인 2009년 영국 정부는 부당한 처우에 대해 공식 사과를 했고 2013년에는 왕실의 특별 사면이 이루어졌다. 또한 그의 생일인 2021년 6월 23일부터는 그의 초상이 담긴 50파운드 지폐가 통용되고 있다. 지폐에는 앨런 튜링의 삶과 컴퓨터 과학, 암호 해독 분야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정밀한 수학적 은유가 가득 담겨 있다. 1951년 촬영된 그의 초상화와 서명, 그의 생년월일인 19120623일을 0과 1로 표현한 25자리 숫자, 튜링 머신의 핵심 수식과 표, 봄브 도안 등이 그것이다.

영국이 최고권액인 50파운드 지폐에 튜링을 새겼다는 것은 단순한 과학적 업적 칭송을 넘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다양성을 존중하고자 하는 영국 사회의 강력한 공적 메시지를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미국 컴퓨터 학회(ACM, 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는 그의 업적을 기려 1966년 ‘튜링상(Turing Award)’을 제정했다. ‘컴퓨터 과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이 상은 컴퓨터 과학 분야에 지속적이고 중대한 기술적 공헌을 한 인물에게 수여된다.